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이토 도산 (문단 편집) == 평가 == '''툭 까놓고 말해 이래저래 역사적 사료와 소설 속 이야기가 뒤섞여 정확하게 묘사하기 힘든 영주다'''. 분명한 사실은 오다 노부나가의 스승 기믹은 시바 료타로나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하 소설 이후 굳어진 기믹일 뿐, 역사상 실제로 그러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아마 노부나가와는 계속 신경전을 벌이며 협력하되 대치하는 상황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오다든 사이토든 주변에 적들이 많아서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함부로 마음을 놓았다가는 상대방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었으니 뭐.] 요시타츠가 친아들이 아니라는 설은 낭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만 그와 별개로 이런 식의 프로파간다를 썼을 가능성은 있다.] 여타 매체에 등장하는 도산의 모습은 실제 모습보다는 소설 속의 인물상이 바탕이 되어 묘사된 모습이 많다. 그러나 당대 사료에서는 흔히 알려진 것과 다른 묘사가 있다. 1960년대 [[기후현]]에서 현사를 편찬하던 도중 1560년 7월 부의 <[[롯카쿠 요시카타|롯카쿠 쇼테이]] 서사>라는 고문서가 발견되었는데, 이 문서는 당시 오미의 슈고다이묘였던 롯카쿠 쇼테이가 가신들 앞으로 보낸 서장으로 여기서 도산의 행적이 일부 적혀 있다. 이 문서에서 사이토 요시타츠의 할아버지가 교토 묘가쿠사의 승려였다가 니시무라로 성을 바꾸었고 미노(오늘날의 기후 현)로 와서 나가이 씨를 섬기며 나가이 성을 칭했다고 하며, 요시타츠의 아버지(=사이토 도산) 대에 가독 상속자를 죽이고 모든 직책을 빼앗아 사이토 성을 칭했다는 기록이 있다. 즉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이토 도산의 '나라 훔친 이야기'는 도산 한 명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2대에 걸쳐서 이루어진 이야기라는 학설이 유력하다.[* 이게 무슨 2010년대의 일이 아니라 이미 1970년대 초반에 발표된 해석이다.] 더욱이 사이토 요시타츠도 이 문서에서는 도산의 아들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추가로 노부나가의 시대를 앞서간 안목의 예시처럼 언급 되는 사례들의 상당수가 사이토 도산이 도입했던 일이라는 말도 있다. 예를 들어 조총의 도입을 적극적으로 한 것이나, 창의 길이를 늘린 것, 상업을 장려하고 상인을 보호한 조치들은 모두 사이토 도산이 먼저 도입했다는 말이 있다. 사이토 도산에 대한 기록도 애매한 면이 많아 절대적으로 믿을 수는 없지만, 누가 도입했던간에 엄밀히 말하자면 전국 다이묘들은 대부분 조총 도입에 적극적이었고, 집단전으로 인해 창의 길이를 늘리는 추세였으며, 상업을 장려했었다. 어쨌든 사이토 도산 역시 이런 흐름을 읽고 있던 다이묘 중 하나였으며, 근처에 있던 노부나가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